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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은 방효철(69) 삼우금속공업(주)(창원 성산구 소재) 회장은 한 학기 동안 경남대 경영대학원 학생을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항상 '인간'과 '신뢰'를 강조한다."지금 이 시대가 아무리 디지털 시대, 스마트폰 시대라고 하지만, 결국 일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을 잘하려면 기술도 중요하지만 사람 간의 소통도 중요합니다.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신뢰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결국, 사람과 신뢰가 성공의 열쇠라는 겁니다."방 회장은 법원에서 공직생활을 하다 사표를 내고 1984년 부도가 난 삼우금속공업의 법정관리인으로 부임했다. 처음 삼우금속공업에 발을 들여놓았을 당시 회사에는 '사람'도, '신뢰'도 없었다. 연간 매출이 15억 원 정도인 회사에 빚이 70억 원이 넘었으니 회사가 제대로 운영될 리 없었다. 그런 회사에 유능한 기술인력이 남아 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기술이 우수하지 않은 업체에 일감이 있을 리도 없었다. 전 경영진의 무능 탓에 사원도 새 경영진을 믿지 않았다. 더구나 금속표면처리(도금)업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 법정관리를 맡겠다고 왔으니 사원이나 거래처에서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마음먹고 한번 시작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인 방 회장도 막막했다. 하지만, 주저앉아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일을 시작했다.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저녁 10시에 귀가하는 회사 생활이 시작됐다. 이 규칙은 약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지켜지고 있다.우선은 영업부터 시작했다. 기존 거래처를 돌며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것을 사정사정해서 일감을 따냈다. 그리고 새 거래처를 뚫었다. 일감을 딴 뒤에는 품질을 높이고 고객을 만족하게 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품질을 높이려면 기술인력 양성이 급했다. 떠나버린 우수기술 인력을 다시 데려올 수 없었기 때문에 기존 사원을 교육해 우수 기술인력으로 키웠다. 이를 통해 불량률을 줄이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씩 품질을 높여나갔다.한편으로는 작은 것에서부터 경쟁사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예를 들면 제품을 포장할 때, 당시만 해도 업계에서는 신문지로 제품을 포장했는데 삼우금속공업은 고급 습자지로 속포장을 하고 다시 신문지로 포장을 해서 제품을 출고했다. 고객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부도나기 전의 삼우금속공업이 아니라는 평판이 돌면서 일감이 늘어나고 매출도 늘었다. 사원도 방 회장을 믿고 회사를 살리는데 동참했다. 딱 3년이 걸렸다.사실, 방 회장은 법정관리인으로서 회사가 정상화되지 않아 정리절차를 밟더라도 일자리는 잃겠지만 그리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어서 목숨 걸고 매달려야 할 상황은 아니었다.그러나 방 회장은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회사가 점차 안정되었지만 이자까지 포함해 은행과 채권자에게 갚아야 할 빚이 100억 원이 넘었다.사원과 고생해 얻은 성과가 모두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고스란히 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채권은행 관계자를 만나 설득도 하고 협박(?)도 했다. 모든 인맥을 동원해 도움도 얻었다. 우선은 원금만 갚고 이자는 나중에 갚겠다고 은행에 제안했다. 전례가 없는 제안이었기 때문에 채권은행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방 회장은 끈기있게 매달렸다."기술력을 확보해 안정적으로 일감이 들어오고 매출도 신장하고 있지 않으냐? 분명히 빚은 모두 갚겠다. 만약 우리 회사가 빚 때문에 문 닫게 되면 은행도 채권을 회수할 수 없게 돼 손해고 국가적으로 손해이지 않으냐고 설득했습니다."채권은행이 방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숨통이 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방 회장은 11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삼우금속공업의 법정관리를 6년으로 끝냈고, 자립의 길에 들어선 이 회사의 주식을 인수해 대표이사가 됐다."사람과 인간관계, 신뢰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주변 사람이 그러더군요. 만약 그때 제가 사람과 신뢰를 중심에 두고 정도경영을 하지 않고 도금업계를 잘 알고 꼼수를 부리는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이라고…."방 회장은 창원 국가산업단지 경영자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2012년 창원시 올해 최고경영인상'을 수상했다. 1995년 동탑·2006년 은탑·2012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07년부터 3년간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을 맡았으며 현재 한국무역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12.10.31.미술 활동을 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뻔하고, 철학과 문학에 빠져 고교 시절을 보냈다. 늘 엉뚱한 일로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서른 살 무렵 치열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는 마지막 시기라는 생각에 절박했다. 그만큼 더 열심히 공부했고 3년 후 33살이라는 나이에 공직에 발을 디뎠다. 어린 시절에는 다소 엉뚱했지만, 지금은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는 하승철 인재개발원 원장을 만났다.중요한 것은 ‘스스로 서늘하게 돌아다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하 원장은 인생의 갈림길마다 그것을 비교적 잘해왔다. 그는 중요한 일은 신중하게 결정했지만, 결정된 다음엔 앞뒤 보지 않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했다.“2009년 로봇랜드 유치를 위해 전국 시도가 사활을 건 전쟁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담당업무도 아니었는데 당시 도지사의 강권에 따라 투입되었죠. 꼬박 3개월을 밤잠 설쳤습니다. 로봇랜드 유치를 총괄 기획하고 100페이지가 넘는 PT 슬라이드를 30번이 넘게 수정해서 프리젠테이션에 나섰습니다.” 하 원장의 노력 덕에 좋은 평을 받고 로봇랜드가 유치되었으니, 그의 죽기 아니면 살기인 인생철학이 공직 생활에서도 드러났다.공무원은 ‘사명감’과 ‘열정’고시를 통해 행정가가 되었다면 우리나라에서 보람있는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진 셈이다. 행정가라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사회를 더 아름답고 좋아지게 할 수 있는 자리 아니던가. 그런 자리기에 하원장은 “행정은 남을 위해서 일하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공직은 남을 위해서 열심히 일도 하고, 월급도 받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었다는 보람까지도 얻는 정말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열심히 안 할 이유가 없죠.”▲ 하승철 인재개발원 원장이러한 사명감이 있었기에 하 원장은 공직 생활을 하며 잘못된 관행은 상급자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개진해서 고쳐나갔다. “돌이켜보면 마음은 당당했으나 개인적으로 얻는 것은 적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부하직원 중에 조금 서투르더라도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있으면 과감하게 지원해주려고 합니다.”그는 인재 조건 중 제1은 열정이라 말하며, 열정이 없다면 고시출신은 밥값 하는 게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런 열정이 일에 녹아 그는 우수바이오기업 유치에 나서기도 했다.“생물산업팀장을 하면서 1000억짜리 프로젝트를 만들었습니다. 중앙관료들을 설득하고 로비하면서 400억 예산을 가져왔죠. 또 헬리콥터를 띄워가면서 우수바이오기업 유치에 나섰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뜨겁습니다.”쏘리쏘리, 공뭔스타일, SNS… 소통을 위한 것하 원장은 하동부군수 시절에는 '쏘리쏘리' 댄스를 정례조회에서 선보였고, 최근에는 '공뭔스타일' 뮤직비디오도 제작하는 등 대중문화 감각이 탁월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춤도 잘 못 추고 노래도 잘 못하는, 가무에 재능이 없는 젬병이었다.“직원들이 편하고 즐거운 직장을 만들자는 생각을 늘 했었습니다. 그러던 찰나, 직원들 사이에서 ‘쏘리쏘리’, ‘공뭔스타일’ 이란 의견이 나왔고 적극 찬성하며 밀어줬습니다. 내가 나서면 이슈가 되고 더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해서 참여도 하게 되었죠.” 하 원장은 상급자인 자신이 망가짐으로 인해 서로 격의 없이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춤을 추고 동영상을 만드는 것에 흔쾌히 동참했다. 그는 즐거운 직장 만들기와 도민에게 한발 다가가는 것 두 개를 동시에 이룰 수 있었다.“도민과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도민들이 좋아하는 방식에 맞춰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도민과 가깝게 지내고자 하 원장은 고위직 공무원 중에서도 SNS 소통에 활발한 편이다. 홈페이지 시대가 끝나고 블로그가 왔을 때에도 이것저것 부지런히 글을 올렸다. SNS시대가 온 후 그는 트위터, 페이스북을 거쳐서 지금은 카카오스토리에 안착을 했다. 일상이야기를 하면서 행정에 대한 것들, 공익에 대한 것들을 조금씩 가미해서 대화하면 서로 도움이 되어서다. “시대에 따라 소통의 방법은 달라집니다. SNS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도민과 호흡하는 가까운 방법이라 생각합니다.”인재개발원 원장으로서지난 1월 ‘공무원교육원’이라는 명칭이 ‘인재개발원’으로 바뀌었다. 교육기능은 영어로 ‘Human Resources Development’이다. 번역하면 인재개발이 되는 것이다. 민간기업에서는 교육원 연수원 이런 말을 거의 안 쓰고, 인재개발원이라고 쓴다. 그 추세를 행정도 따라가고 있다. 전국에서 반 정도 그렇게 이름을 바꿨다. ▲ 하승철 인재개발원 원장“인재개발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사람들은 공무원교육기관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새벽 인력시장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공무원조차도 신규공무원들이 교육 들어오면, 민간기관인 줄 아는 이도 꽤 있었고요.”그는 인재개발원 첫 시작으로 자체적 조직진단에 나섰다. 그 후 민간기업과 중앙 타시도 교육기관에 벤치마킹을 보내어 한 달 만에 10대 핵심과제를 발굴했다. “경남의 인재상과 핵심가치를 정립하여 그에 맞는 교과를 개발하고 운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보았습니다. 경남과 경남 도정에 맞는 독자적이고 실용적인 교육과정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주 중요했고요. 경남의 인재가 읽어야 할 도서 100권 선정, 경남바로알기과정 개발 등도 그러한 활동 중 하나였습니다.” 인재개발원에서는 목표를 잘 설정하여 좋은 과정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질 높은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는 교육생들이 원하고, 또 일선 행정현장에서 실력이 발휘되는 그런 교육을 알기 쉽게 전달해야 했다. 그렇기에 그는 과정을 설계할 때 그야말로 모든 노하우를 다 발휘해서 강좌와 강사를 선정했다. 현장 학습의 경우 꼼꼼하게 연구하고 확인하고자 수십 차례 출장을 보내기도 했다. 강사공모제를 하고 전국의 유명 강사 리스트도 구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전 직원이 모여 치열하게 토론해서 문제점을 찾고 개선했다. “교육 관련 월별 만족도 통계를 내서 추이를 관찰하고 이를 직원들도 공유합니다. 그러면, 직원들도 덩달아 목표가 생기죠. 이런 과정을 거쳐 많은 문제가 개선되면서, 교육생의 만족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 하승철 인재개발원 원장하 원장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중요한 것은 ‘공무원으로서 열정과 사명감’이라고 말했다. ‘열정’과 ‘사명감’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하 원장은 ‘아름다운 관료’가 되고자 노력했다.“제 좌우명은 인연·신뢰·의리입니다. 좋은 인연을 만나면 신뢰를 지켜서 가꾸어야 하고, 인연과 신뢰를 주고받았다면 전력을 다해 의리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에서는 크게 부끄러운 것이 없어요.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12.10.22.지난 여름방학에 합천에서 남해까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따라 국토순례를 다녀온 대학생 문순필 씨가 소중한 경험을 얘기했습니다. 20대라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일이라며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말하네요...
12.10.19."14일 저녁 엄마에게 전화가 왔어요. 제가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게 됐다고요. 처음에는 얼떨떨하더라고요. 모두 가족과 친구 덕이에요."마산고등학교 2학년 노용후(작은 사진) 군이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는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주최하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주관한 '2012 대한민국 인재상' 수상자 10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노 군은 시력 장애를 극복하고 우수한 학업 성적을 거둔 공로를 인정받았다.노 군은 시각장애 1급이다. 1급 시각장애인은 빛과 어둠, 근접한 물체의 형체를 겨우 구별한다. 하지만, 노 군은 확대기로 교과서와 문제집을 보고 필기한 내용을 컴퓨터로 타이핑한 후 점자로 변환해 공부하고 있다. 15일 끝난 중간고사 때도 확대기를 이용해 시험 문제를 읽고 답을 풀었다.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노용후 군의 의지 때문이다."친구들보다 공부하는 시간이 배로 들어요.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문과 1등을 넘어서 전 과목 1등이라는 목표를 생각하고 이겨냅니다."그의 말에서 공부에 대한 각별한 집념을 느낄 수 있었다.태어날 때부터 저시력을 앓았다는 노 군은 오른쪽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하지만, 중 1때 줄넘기를 하다 '망막박리증'이라는 병을 얻었고, 오른쪽 눈마저 시력을 잃었다. 중학생 시절 내내 수술을 받으러 다닌 노 군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원망도 많이 했다"고 했다.그러던 어느 날 아들만 걱정하는 어머니의 기도를 우연히 들었고, 노 군은 매일 등하교를 책임지고, 교과서를 읽어주고 자료를 찾아주는 부모님께 효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때부터 공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현재 문과 전교 1등. 또 독후감 쓰기 대회와 영어경시대회 등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노 군이 자신 있는 과목은 영어다. 장래희망도 영어교사라 사범대 진학이 목표다. 최근에는 영어 학습서도 만들었다."시험공부를 하면서 요점을 정리해 영어 학습서를 만들었어요. 남동생이 컴퓨터로 작성하고 부모님이 책으로 엮었는데, 영어가 어렵다는 친구들에게도 나눠줬어요. 화장실 갈 때 밥을 먹을 때 항상 옆에 있어주는 예찬이와 승혁이 등 여러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요."오는 12월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는 노 군은 "가족과 친구, 선생님이 없었다면 수상의 기쁨도 없었다"며 '장애'는 '노력'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12.10.11.경남도의회 후반기 의회 운영위원장에 당선된 정재환(59·새누리당·양산2) 의원은 "낮은 자세로 의원님들의 눈높이에 맞춰 의회를 운영하겠다는 소신을 끝까지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여야 간 소통과 화합을 이끌어내면서 도민들의 민생에 발 빠르게 대처하겠다는 마음가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의회운영위는 의사 일정을 조율하고 의원들의 의정 활동을 보좌하는가 하면, 각 상임위와 여야 의원들의 의견을 취합해야 하고 의회와 집행부 간 가교 역할까지 담당하는 등 의회가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사령부'라 부를 수 있는 곳이다.정 의원은 경남도의회 의회운영위원장 자격으로 전국 광역시도의회 의회운영위원장 협의회 정책위원장을 맡았다. "새누리당이든 민주당이든 도의원 유급 보좌관제를 대선 공약으로 채택시키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고, 이를 관철시키는 데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정 의원은 양산시의원으로 8년, 그리고 도의원으로 2년을 보내면서 유급보좌관제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도의원의 경우 자신의 지역구뿐 아니라 경남도 전체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정책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경상남도 구석구석을 누비며 발로 뛰는 의정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유급보좌관제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 국회에서도 광역의회에 배려를 해야 하고요." 도의회의 권익을 대변하는 활동 못지않게 의회운영위원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이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일이다. 이에 대해 정 의원은 자신의 '소통론'을 풀어냈다."공무원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고, 국민의 표를 받은 선출직들은 신화를 창조해야 합니다. 역사와 신화가 함께 어우러져야 살기 좋은 고장 아니겠습니까? 정치를 하려면 협상과 타협의 귀재가 되어야죠.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지녀야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는 불륜이라는 식은 안 되죠."남에 대한 배려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자세는 정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면서부터 마음속에 새긴 덕목이다. "남을 이기려 하지 말라, 자신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이 남을 이기려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자"는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경구를 항시 가슴에 품고 있기도 했다.정 의원의 이 같은 정치 철학은 누구보다 힘들었던 그의 인생 역정에서 기인했다.정 의원은 중학생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동생 둘을 거느린 소년 가장으로 성장했다. "지금이야 사회복지 시스템이 그래도 잘 돼 있지만 당시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죠.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제 삶을 다듬고 가꾸는 데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습니다."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겨운 시기였다.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중년기에 접어들면서 '무엇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저처럼 소년·소녀 가장으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뭔가 해줄 게 없을까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저에게는 아무 사회적 직위도, 직함도 없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했고 1등 시의원이 되겠다고 다짐했죠."정 의원은 현재 여러 사회단체에 도움을 주고 있었고, 소년보호관찰소 등을 방문해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으며 청소년들에게 꿈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어떻든 삶에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저를 꾸중하는 사람도, 칭찬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제 판단으로 인생길을 걸어왔습니다. 그게 힘들었습니다. 중심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 경험담을 돌려주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잘나서 특강을 하는 건 아닙니다."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고, 또 자신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세상. 정 의원이 추구하는 의정활동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아침에 항상 주문을 외웁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인연을 맺은 분들 덕분으로 이렇게 버티는 게 감사하고, 또 인연을 맺은 분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12.10.11.